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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조선을 뒤집은 황당무계 사건들

조선을 뒤집은 황당무계 사건들
  • 저자정구선
  • 출판사팬덤북스
  • 출판년2014-10-25
  • 공급사(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6-01)
  • 지원단말기PC/스마트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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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점을 쳐서 수도를 결정하다, 임금을 몰래 미행한 사관,

    젖비린내 나는 아이가 관리가 되다, 판서가 졸병과 함께 보초를 서다,

    코끼리에게 밟혀 죽은 판서, 서울에 운하를 건설하려고 하다,

    노비에게도 봉급과 휴가를 주다, 화폐 위조범을 찾아라,

    외국 사신을 놀라게 한 불꽃놀이…….





    조선판 ‘세상에 이런 일이’

    조선에서 일어난 흥미롭고 놀라운 사건들!




    조선 시대라 하면 고루하고 답답한 시대였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아주 흥미로운 시기였다. 《조선왕조실록》을 찬찬히 읽다 보면 조선의 속살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야말로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친, 야사보다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마치 ‘세상에 이런 일이!’라고 놀랄 정도의 역사가 가득하다.

    《조선을 뒤집은 황당무계 사건들》은 실록 속에 숨어 있는 흥미진진하고 황당한, 때로는 놀라운 역사를 정리하여 담아낸 이야기보따리다. 책에 실린 이야기를 통해 조선의 생생한 역사 속으로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가 그동안 감추어진 속살을 들여다볼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나아가 조선 시대, 조선 사람들에 대하여 좀 더 폭넓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책의 기본 배경은 조선 건국 직후인 태조 때부터 3대 태종 때까지이다. 해당 시기의 국왕과 왕실, 관료, 백성, 명나라 사신과 관련된 역사로 이루어져 있으며, 후대 왕의 연간에서 관련 일화를 첨부하기도 했다.





    왕실에 그런 황당한 일이!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공신들은 고려 왕실의 후예인 왕씨들이 살아 있는 한 편히 발을 뻗고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마침내 그들은 모반을 도모했다는 허무맹랑한 구실을 꾸며 왕씨들을 일망타진하였다.

    조선은 태조 3년 9월에 한양으로 수도를 옮겼지만, 그 이전에는 계룡산 부근에 수도를 정하려다가 취소하였다. 다시 서울의 무악재 아래 신촌 일대로 옮기려다가 포기한 적도 있다. 한양에 수도를 정한 조선은 ‘왕자의 난’ 이후 개성으로 잠시 옮겼다가 태종 때 한양으로 재천도하였다. 한양으로 재천도하는 결정은 종묘에서 동전으로 점을 쳐서 정했다고 한다.

    덕수궁이란 이름을 가진 궁궐은 엄연히 조선 건국 직후부터 있었다. 태조 이성계가 1398년 10월 왕위에서 물러난 이후 그가 머물던 궁궐을 태상궁이라고 불렀다. 정종 2년 6월에 당시 세자로 있던 이방원의 청에 따라 태상궁의 이름을 덕수궁이라고 고친 것이다.

    신생 왕조를 안정시키고 기틀을 튼튼히 하기 위해서는 콧대가 한껏 높아진 무신들을 억누르고 상대적으로 의기소침해 있는 문신들을 다독여 주어야 했다. 무관 출신인 태조 이성계와는 달리 과거에 급제한 문관 출신인 태종은 무관을 무시하거나 경멸하는 태도를 보였다. 태종은 무예를 한갓 미친 짓이라고 하기도 했다. 문무의 균형을 맞추려는 태종의 현명하고 원대한 정치적 안목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조선 시대에는 재상 등의 고위직을 역임한 신하들이 사망하면 임금이 부의금을 하사하고, 성대하게 장례를 치러 주며, 시호를 내렸다. 부의로 1품은 쌀과 콩을 아울러 60?100석, 정2품은 40?50석, 종2품은 30석 이하를 주었다. 1석을 2가마로 치고, 1가마를 80kg으로 환산하면 100석은 약 200가마로 16,000㎏이다. 당시 재상들은 정말 어마어마한 부의금을 하사받았던 것이다. 임금님의 지나친 부의금 때문에 나라 곳간이 거덜 날 정도였다.

    사초는 사관이 임금이나 신하들의 언행을 날마다 기록한 것으로, 실록 편찬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초 자료였다. 사관들이 안심하고 직필하도록 실록을 편찬하기 전까지는 임금을 비롯한 그 누구도 사초를 볼 수 없었다. 그런데도 태조와 태종은 굳이 사초를 열람하려다가 신하들과 충돌을 빚었다.

    고려 32대 왕으로 공민왕의 아들인 우왕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이후 폐위되었다가 죽임을 당했다. 우왕에게는 모두 9명의 왕비가 있었는데, 대부분 궁궐에서 쫓겨나 본가로 돌아갔다. 본가로 쫓겨난 왕비 중에는 우왕의 제8비였던 선비 왕씨도 포함되어 있었다. 선비는 본가로 쫓겨난 뒤 조선이 들어서자 판통례문사를 지낸 유은지와 재혼하였다. 한때 자기가 섬기던 왕의 부인을 아내로 삼은 것은 군신의 예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삼강오륜을 어지럽히는 짓이라는 여론이 거셌다.

    태종이 어느 날 포천군에서 사냥을 하였다. 수행하던 사람들 가운데 6명이 숙소에서 쑥갓과 거여목처럼 생긴 독초를 잘못 먹고 갑자기 죽는 일이 벌어졌다. 소식을 들은 임금은 앞으로 자기의 식탁에 쑥갓과 거여목을 올리지 말라고 지시하였다.





    관리들이 감히 이런 일을!



    조선 초기에는 나이 어린 사람들이 관리가 된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는 젖비린내 나는 아이가 관리가 되어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조선 시대에도 요즈음의 인사 청문회와 비슷한 서경署經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관리 후보자들의 신분, 조상, 과거 합격 여부 등을 조사하여 관리로서의 적합도를 검증하는 제도로, 서경을 통과하지 못하면 관리가 되지 못했다.

    조선 초기에는 관청에 출근하지 않고 결근하거나 조퇴하는 관리들이 많았다. 조정에서는 이들에게 매를 쳐서 징계하였다. 지방으로 전출되면 부모의 병을 핑계로 관직을 내던지고 내려가지 않는 관리들이 많아 큰 골칫거리가 되기도 했다. 또한 임금의 부름에 항상 응할 수 있도록 2품 이상의 재상들은 지방에 머물지 말고 한양에 거주하도록 하였다.

    조선의 대간들은 한 가지 문제가 생기면 수없이 간언을 올리거나 상소를 올려 임금을 괴롭혔다. 태종은 참다못해 신하들이 세 번 이상 간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기까지 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어이없는 일로 처벌을 받은 관리들이 많았다. 임금에게 올리는 글에서 본인 이름 앞에 신臣 자를 붙이지 않았다고 하여 파직된 관리가 있었다. 시호를 잘못 정했다가 교수형을 당할 뻔한 관리도 있었다. 문서나 본인 이름에 임금과 세자의 이름을 쓸 수 없어 이름을 두 번 바꾸어야 했던 공신도 있었다.

    조선 건국 직후에는 저녁 8시경부터 새벽 4시경까지 4대문을 통과하거나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는 야간 통행 금지령을 실시했는데, 영을 어겼다가 파직된 대사헌도 있었다. 심지어 비가 많이 내려 농민들이 기르는 벼를 떠내려가게 했다는 죄로 수령을 파직하기까지 하였다.

    태종 때 공조 전서를 지낸 이우가 일본에서 보낸 코끼리에게 침을 뱉었다가 밟혀 죽었다. 고려 후기의 대학자인 이제현의 증손자 이담이 미친개에게 물려 죽었다.

    태종의 딸과 자기 아들과의 결혼을 단호하게 반대했다가 역적으로 몰려 노비로 강등된 전직 군수가 있었다. 조선 초기의 대표적 문신인 변계량은 20여 년 동안이나 대제학을 맡으면서 크게 존경을 받았지만 집에서는 그렇지 못하였다. 후처를 방에 가두어 두고 창구멍을 내어 음식을 주거나, 소변도 자유롭게 보지 못하게 하는 등의 박대를 하여 탄핵을 받았다.

    궁녀는 일단 궁에 들어가면 왕의 여인이었다. 혹시 궁에서 나가더라도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 없었다. ‘왕자의 난’을 치른 공신으로 태종의 총애를 받았던 조영무가 궁녀를 첩으로 삼았다가 많은 비난을 받았다.

    조선 왕조는 신분 제도를 엄격히 하기 위하여 노비, 기생 등의 천인과 양인 간의 결혼을 건국 초기부터 강력하게 금지하였다. 그럼에도 첨절제사를 지낸 정복주가 본처를 버리고 기생의 딸과 혼인하여 후처로 맞았다가 관직을 잃고 평민으로 강등된 일이 있었다.

    조선 군대에는 돌을 던지며 싸우는 척석군이 있었다. 수군에서는 왜구를 추격하기 위해 쾌선 내지 경쾌선이라 불린 작고 빠른 쾌속선을 만들어 실전에 투입하기도 하였다.





    백성들에게 과연 무슨 일이!



    재판에 불만을 품은 여인이 임금이 어가를 타고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 앞으로 뛰어들었다. 호위병과 부딪힌 여인은 임금 앞에서 크게 부르짖으며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임금이 격노하여 곤장을 때리고 지방의 관노비로 삼도록 했다.

    조선 초기에는 황제의 색깔이라고 하여 황색과 황색 옷의 사용을 금지하였다. 그 외에 흰색과 옥색, 회색의 옷도 입지 못하게 했다. 황색으로 보자기를 만들어 가지고 다니다가 귀양을 간 사람이 있었다.

    국가 소속의 공노비들은 봉급을 받고 휴가를 가기도 했다. 태종 때 처음 만들어 사용한 지폐인 ‘저화’를 위조하는 사람들이 많아 유통이 부진을 면치 못한 일도 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성직자들에게 세금을 징수하지 않는다. 조선 시대에는 무당에게도 세금을 거두었다. 국가에서 3년마다 한 번씩 무당의 명부를 작성하여 무세巫稅를 징수했다. 무세는 원래 매년 두 번 징수하였는데, 세종 5년부터는 매년 한 차례만 거두도록 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경상도나 전라도, 충청도 지방에서 조세로 거두어들인 곡식이나 베 등을 주로 배를 이용하여 한양까지 운반하였다. 이를 조운이라 하였고, 그 배를 조운선이라 불렀다. 조운선이 풍랑을 만나 난파하거나 침몰하여 곡식과 사람을 잃는 사고가 매년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태종 3년에는 조운선 34척이 한꺼번에 바다에서 침몰하여 천여 명의 수군이 몰사하는 대형 사고가 발생한 적도 있었다. 조운선의 침몰은 인명은 물론 국가 재정에 막대한 손실을 초래하는 재난이었다.

    조선 시대에 중요한 재산은 토지와 노비였다. 태종 때 남양군에 봉해지고 상의중추원사를 역임한 홍길민은 노비를 무려 천여 명이나 소유하였다고 한다. 노비로만 따지면 그는 아마도 조선 초기 최대의 거부가 아니었을까.

    죽은 사람의 생식기를 잘라 가는 엽기적인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태종 3년 5월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리던 날, 황해도 봉산에서 어떤 남자가 소를 끌고 가다가 벼락을 맞아 죽었다. 이때 죽은 사람의 손가락과 생식기인 음경을 잘라 간 사건이 일어났다.

    조선 시대에도 인명 보호 차원에서 오늘날의 삼심제와 유사한 삼복법三覆法을 시행하였다. 지방에서 사형에 해당하는 죄가 발생하면 수령이 먼저 심리하여 관찰사에게 보고하고, 관찰사는 다시 심리하여 중앙의 의정부에 보고하며, 의정부에서는 세 번 심리하여 임금에게 세 번 아뢴 다음에 사형을 결정하도록 했다.

    비록 사형에 처할 만한 죄를 지었더라도 죄인이 독자면 살려 주는, 이른바 독자존류양친법獨子存留養親法이라는 법규가 있었다. 외아들이 죽으면 늙은 부모를 봉양할 사람이 없어지기에 살려 준 것이다.

    조선 시대의 형벌 중에는 곤장으로 죄인을 때리는 장형이 있었다. 장형은 죄의 경중에 따라 최하 60대에서 최고 100대까지 치도록 했다. 때로는 곤장을 60~70대 맞고도 죽는 사람이 있었으며, 100대를 맞으면 대개 사망에 이르렀다. 곤장 100대는 치사율이 거의 100%였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사라진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형벌이 많았다. 몸을 여러 조각으로 찢어 죽이는 능지처참 외에도 중국 고대에 행해진 오형 중 얼굴 등에 문신을 하는 묵형墨刑, 즉 자자刺字와 발꿈치를 베는 비형?刑이 행하여졌다.





    중국 사신이 어떻게 그런 짓을!



    전라도 장성의 길가에 큰 나무가 있었다. 사람들은 가지가 많다는 뜻의 ‘백지수百枝樹’라고 불렀다. 태종 때 명나라 사신 황엄이 지나다가 그 나무에 비밀스럽게 구리 못을 박아 놓았으나, 고을의 현감 허규가 못을 뽑아 버렸다. 황엄이 나무에 못을 박은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그가 압승술을 썼다고 생각하였다.

    원래 중국 사신이 오면 연회를 끝내고 기생으로 하여금 수청을 들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중국 사신들은 가까이했던 기생을 못 잊어 사랑에 빠지기도 했고, 급기야는 기생을 중국으로 데리고 가려 하기도 했다.

    금강산은 우리나라 최대의 명산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금강산의 명성은 예전부터 중국에까지 퍼져서 조선에 오는 명나라 사신들마다 모두 금강산을 유람하려고 안달을 하였다.

    고려와 조선에서는 중국에 막대한 공물을 보냈다. 물품 외에도 처녀와 환관 등의 사람들도 보내야 했다. 조선 초기에 명나라에서는 환관으로 쓰기 위해 화자, 즉 고자를 보내라고 요구하였다. 태조 때부터 성종 때까지 15회에 걸쳐 모두 200여 명의 화자를 바쳤다.

    화자 외에 처녀도 보냈다. 중국에 보낸 처녀를 이른바 공녀라 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충렬왕 때부터 공민왕 때까지 80년간 모두 50차례에 걸쳐 수천 명 이상의 처녀들이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갔다. 조선 시대에는 태종 때부터 세종 때까지 20여 년간 7회에 걸쳐 100여 명의 처녀들이 명나라에 바쳐졌다. 후기에는 인조~효종 때 20여 명의 처녀들이 청나라에 끌려가야 했다.

    명나라에 보내는 공물에는 말과 소도 있었다. 태종 4년에는 명나라에서 농삿소 1만 마리를 요구하여 여러 차례로 나누어 보내야만 했다.

    조선 초기만 해도 숭불 풍조가 남아 궁중에도 부처의 진신 사리 같은 사리가 많았다. 명의 3대 황제 영락제가 이것을 보내 달라고 요구하였다. 태종과 세종이 궁궐과 각지의 사찰에 보관되어 있던 사리를 모아 모두 1,300여 과를 보냈다.

    조선 초기에는 왜구들이 전국의 연안에 출몰하여 재물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잡아가는 일이 잦았다. 조정에서는 일본에 잡혀간 사람들을 데려오려고 여러 가지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태종 16년에 돌아온 전언충이라는 사람은 무려 21년 만에 귀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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